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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던 청소년기에 읽어 봤었던 소설, 새삼 마음이 아려오네요.

새해 들어 독서를 더욱 열심히 해 봐야겠단 결심으로 주중에 꼭 한 번씩 찾게 되는 시립도서관에서 우연히 손끝에 스치던 이 소설책을 꺼내 들고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 있었어요.
고등학교 축제 교내 축제 기간에 연극반 친구의 공연으로 만났던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
그 시절은 왠지 이 야기를 풀어가는 연극반 학생들의 연기가 다소 과장되게 느껴지기까지 해서 소설 자체의 흥미를 찾아보기가 힘들었죠.
"우린 이렇게 힘들게 이 세상의 수레바퀴를 밀기도 또 수레바퀴에 밀리기도 또 가끔 깔리기도 한단 말이야!"라는 과장된 감정들에 쉽게 공감이 가질 않는
하지만 문득! 그들이 버거워했던 인생의 수레바퀴를 한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 졌답니다.
나 또한 느끼지 못했던 나만의 수레바퀴를 어떻게 끌어가고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네요.

누구나 큰 인물이 될 거라는 기대를 한 번에 받고 성장해 가는 한스는 늘 다른 친구들보다 앞서 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살고 있었지만 자부심도 잃고 싶지 않은 소년입니다.
하지만 한스는 사실 친구들과 즐겁게 뛰놀고 토끼를 키우고 낚시를 하며 살아가고 싶은 다른 평범한 친구들과 다를 바가 없는 아이였습니다. 한스는 그 나이또래가 갖는 많은 욕망을 억누르며 마음의 병이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주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여 신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합니다.
그것으로 한스가 꿈꾸던 행복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한스는 신학교에서 더 높은 이상을 꿈꾸며 인간관계에서의 실패를 맛봅니다.
한스와는 정반대의 성격인 하일 너를 의지하고 또 하일 네가 처한 곤경을 외면함으로 얻었던 배신자의 굴레로 힘들어했고 또 마지막에는 하일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여 그 배신자의 굴레를 벗어던지며 신학교 교사들의 만류를 아랑곳하지 않고 반항적이고 시적인 열정이 가득한 하일 너의 곁을 지킵니다.
결국 하일 너는 학교의 제도에 반항하다 떠나게 되고 그가 떠난 후 한스는 맹목적인 자신의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더 이상 학업에 열중도 못하고 성과도 못 이루며 극심한 신경증세를 겪다가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다시 찾은 그의 고향에서 한스는 낙오자라는 딱지를 붙고 과거에 자신들의 우위에 섰던 한스의 몰락을 비웃는 이들 틈에서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인생의 수레바퀴가 진흙에 빠져있음을 깨닫지만 더 이상 그 수레바퀴를 밀고 나가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갑니다.

막연히 아주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무한 경쟁의 시대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해보았는데 100여 년도 더 전에 먼 나라의 한스의 이야기는 지금 사회현상과 너무나 닮아 사뭇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서양에서는 이미 이러한 혼돈의 현상들이 지나갔으므로 그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의 청소년들과 좀 다를까? 의문을 가져 봅니다.

세상은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 의미는 나 혼자서 이 힘든 세상의 수레바퀴를 굴려야 한다는 중압감은 벗어던져도 되는 걸까?
이 땅의 한스들은 과거의 한스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그냥저냥 사는 게 아니라 잘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환경을 탓하지 않고 나 스스로 진흙 속에 빠져있는 듯한 인생의 수레바퀴를 힘껏 밀다보면 그 큰 수레바퀴도 자연스럽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천천히 굴러가 주는 것일까? 이 모든 것에 또 다른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저 또한 힘들지만 더 뻑뻑한 흙구덩이에 바퀴를 빠뜨려 생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이 땅의 한스들에게 제 힘이 조금이라도 보태져서 그들이 일어설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들에게 힘을 보태봐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누군가 과거의 한스였던 저를 일으켜 세워주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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